한 주의 중간인 수요일을 선거일이라고 휴일로 정해주니 마음이 제법 한가하다.
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쉬나 싶어 괜시리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투표하고 집안일이나 해야겠다."하는데
토끼가 우리 이불에 오줌을 쌌다.
그렇잖아도 빨래가 잔뜩 밀린 상황에 그것까지 더 얹어지니 정말 해야 할 빨래감이 산더미같아 걱정스러운데
봄비 내리는 하늘은 눈치없이 잔뜩 먹구름이다.
우리딸 현민이는 토끼가 강아지인 줄 안다.
번쩍 들어다 우리가 있는 침대 위에 놓기도 하고 카펫트 깔린 내 연습실에 가져다 놓기도 한다.
토끼집이 3미터 가까이나 되는데도 협소해 운동하기 적합치 않다며 하는 행동이다.
그럼 토끼는 신난다며 몸을 비틀며 점프를 하고 쏜살같이 뱅뱅돌아 현민이를 즐겁게 하곤 하는데
오늘따라 토끼의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지금까지 한 번도 하지 않던 '이불에 실례하기'를 한 것이다.
토끼 덕분에 이불빨래를 한다며 기분좋게 이불을 뜯는데 그래도 현민이는 미안한지 조용히 제 침대에 가 눕는다.
착한 아이다.
자, 이제 김치를 만들자.
지난 주에 자연으로부터 획득한 들판표 고들빼기를
인터넷 뒤져 요리법을 배운 뒤 그대로 며칠에 걸쳐 쓴맛을 우려냈고 드디어 버무렸다.
얼마나 손이 가는지 내 다시는 안 한다 다짐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작은 뿌리 사이사이마다 흙에 포진된 채 씻어도 씻어도 꺠끗해지는 기미가 안보여 가는 솔로 열심히 비빈다.
며칠째 시간날 떄마다 조금씩 조금씩,
그렇게 씽크대 앞에 서서 눈을 크게 뜨고 뿌리와 잎을 씻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팔 아프고 다리 아프고 흑흑.
이걸 하나씩하나씩 어떻게 다듬냐며 그냥 버리고 첼로 연습이나 하겠다 하니 남편이 조용히 다가온다.
어떻게 배워 알게 된 풀인데 이걸 버리냐며 그냥 참고 해보자 한다.
남편과 함께 이틀에 결쳐 시간나는 대로 조금씩 다듬으니 어느새 끝이 보이고 결국 마지막 고들빼기의 손질을 마친 우리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포기하고 싶었던 일을 참고 참아 기어이 마쳤을 때의 그 기쁨,
그것때문에 우리는 '도전'이라는 것을 하는 거겠지.
어렵게 완성한 고들빼기 김치다.
그런대로 양념맛은 괜찮은 것 같은데 이 김치의 맛이 어떨지는 아직...
비인에서 유학할 때 유학생식 김치를 만들어 봤고 그 후 처음이라 솔직히 자신은 없다.
그러는 사이 비가 그친다.
물기를 털어 낸 목련이 맑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마침 투표하러 나갈 생각이었는데 비가 그쳐 다행이다.
별스러운 사람들.
인터넷을 보니 투표를 마치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던데 정말 사람들이 이곳에서 너도나도 기념사진을 찍는다.
내가 행사한 이 한 표가 나라의 참된 일꾼을 뽑는데 일조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도 민망함을 무릅쓰고 한 컷.
투표도 했고 비도 그쳤는데 딱히 할 일도 없고 갈 곳도 없다.
두리번거리는데 현수막이 눈에 들어온다.
오토캠핑 전문점 오픈이란다.
"심심한데, 가자.~"
전주 초입에서 5킬로미터 정도 가면 오른쪽에 보이는 오토캠핑 샾이다.
원래부터 이자리에 있었던 매장이긴 한데 아래층만 사용하던 예전와 달리 이층을 스노우피크 전문매장으로 만들었단다.
전층 매장으로는 전북권에서 유일하다 말하는 사장님의 표정에서 사업에 대한 긍지와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이 한 층에 있는 것만 2억원어치라는데
제품 좋은 거야 사용해 본 나로서는 당연히 잘 알지만 워낙 고가라 어느 정도나 매출로 이루어질지 걱정이 된다.
웃는 모습이 참 예쁘던 사장님, 사업 번창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제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우우 살 겸 마트로 향한다.
마트도 참 오랜만이다.
집 옆에 롯데백화점과 이마트 전주점이 있으니 자주 들를 것 같지만 실상 살다 보면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바쁜 마음에 설사 들른다 해도 필요한 것만 재빨리 사서 나오니 딱히 '쇼핑'이라 할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둘이 함께 하는 이 한가한 쇼핑에 내 발등이 부서질 듯 아픈 걸 보니 남편도 만만치 않게 피곤할 법한데
그래도 남편이 웃는다.
유학 중 일이 생각난다.
나도 공부하고 연습해야 하는데
남편은 늘 하던대로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내게서 밥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하루는 공부를 마치고 저녁 9시에 무거운 첼로를 메고 전철을 두 번 갈아타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린 딸이 배고프다며 내 다리에 매달려 칭얼거린다.
어찌 아직까지 밥을 안 먹었냐 물었더니 남편 왈, 나 오면 같이 먹으려고 기다렸단다.
그런데 가만 보니 밥도 반찬도 아무것도 없다.
마음은 내가 오면 함께 앉아 밥을 같이 먹고 싶었겠지만 결국 남편은 내가 와서 밥해주길 기다린 셈이 되었다.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웠는지.
그러던 사람이 많이 변했다.
설거지가 조금 밀렸다 싶으면 어느새 고무장갑 낀 손으로 그릇을 씻고 있고
집안 일 하는 나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만 보던 사람이 두 팔 걷어 날 돕는다.
청소도 쓱쓱싹싹 잘 하고 압력밥솥 밥도 척척,
나날이 괜찮은 남편이 되어 가고 있으니 내가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온 첫 해,
암보험이 65세까지 보장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85세로 연장되고 그러던 것이 지금은 100세다.
그만큼 예상수명이 공식적으로 연장되었다는 이야기인데
난 그렇게 오래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내가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려 의식이 없거든 살리려고 애쓰지 말라고.
태어나는 사람이 있으면 죽는 사람도 있는 법,
자연스럽게 사망할 권리가 우리에겐 있는데 억지로 생명을 연장한다면 그 남은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게
내 생각이다.
이런 말 하기 민망할 만큼 우리는 아직 너무 젊다.
하지만 나는 남편에게 사는 동안 만큼은 열심히 사랑하면서 서로 노력하자 했다.
우리는 인생길 마지막까지 함께 할 애인이며 친구이자 동료니까.
오늘도 남편은 발전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이다.
지금처럼 넓은 마음과 깊은 생각으로 내 곁에 오래오래 있어주길 바란다.
"땡큐,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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